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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브스턴스(The Substance): 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사람

엘리자베스는 한때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고 명예의 거리까지 입성한 대스타였지만, 지금은 주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TV 에어로빅 쇼 진행자로 겨우 셀럽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50살이 되던 날, 중년 남성 프로듀서에게서 “어리고 섹시하지 않다”는 이유로 쇼에서 잘린다. 모든 불행이 나이 든 자신의 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혐오하던 엘리자베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통해 젊고 아름다운 또 하나의 자신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당연히도 영화의 결말은 파국이다. 둘은 대립하고 서로를 제거하려고 하지만 상대는 또 다른 나이기에 완전히 죽여버릴 수가 없다. 아이러니 중에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문제는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젊은 나’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엘리자베스는 그 기..

현대적 고통과 의미찾기: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청아출판사/ 2005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홀로코스트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희망이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을 통해 극한 상황에서도 유지될 수 있음을 역설했다. 프랭클은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고통도 견딜 수 있다"라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며 의미를 찾는 것이 인간을 구원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그가 주장하는 로고테라피(Logotherapy)의 핵심이다. 그는 삶의 의미는 창조적 활동, 사랑,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며 이러한 사상의 바탕을 홀로코스트라는 극단의 상황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생존자들의 모습을 통해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세 가지 의미의 근거 즉, 창조적 활동, 사..

집:가는 곳≠돌아가는 곳

고잉 홈> 문지혁/ 문학동네/ 2024 『초급 한국어』와 『중급 한국어』의 작가 문지혁의 단편집. 다른 문집을 통해 몇 편은 이미 읽었던 터라 책을 사지는 않고 도서관에 입고되기를 기다렸더니 꼬박 1년이 걸렸다. 9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 『고잉 홈』은 이전의 한국어 시리즈와 같이 (작가의 미국 유학생활이 바탕이 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양한 형태로 살아가는 미국 이주자들의 이야기이다. 각각은 유학생이기도 하고(「고잉 홈」, 「핑크 팰리스 러브」, 「골드 브라스 세탁소」, 「뷰잉」, 「나이트호크스」, 「뜰안의 별」), 이민자이거나(「에어 메이드 바이오그래피」), 여행자이거나(「크리스마스 캐러셀」) 때로는 입양아이기도 한데(「우리들의 파이널 컷」) 미국 생활에 적응을 했든 못했든,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었든 ..

SF 앤솔러지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서> 정보라 외 19인/ 현대문학/ 2022『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서』는 출판사 현대문학과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가 공동기획해 국내 SF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20명의 작품을 한데 묶은 앤솔러지이다.참고로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는 ‘SF작가들의 창작의 자유와 권리 보장, SF작가들의 활동지원, 단체 내외의 인권문제 연대를 목적으로 2017년 설립된 대한민국 과학소설작가들의 직역단체이다’라고 책날개에 안내되어 있다. SF작가들이(다른 작가들의 경우는 어떻게 직역단체가 구성되어 있는지 몰라서 일단 SF작가에 한정해보면) 어떤 식으로 창작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또 권리 침해를 받는지가 궁금하긴 했다. 어쨌든 그리하여 국내 보기 드물게 총 20명 SF작가들의 단편을 한 번에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기억을 팔아서 원하는 것을 사세요 <국경시장>

국경시장> 김성중/ 문학동네/ 2015 최근에는 SF나 환상문학을 다루는 ‘젊은’ ‘여성’ 작가를 보기 어렵지 않지만, 당시에는 조금 선구적인 편이지 않았을까 싶다. 오해는 마시라. 젊다, 여성이다, 등의 표현을 쓴 것은 매우 객관적인 기준이 있어서다. 김성중 작가가 같은 제목의 단편으로 2012년 제3회 “젊은작가상”을 받았으니 ‘젊’다고 한 것이고,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들을 보면 2010년대 후반에서 2020년대에 들어 김초엽, 천선란, 심너울 등 3세대 여성 SF 작가들의 활약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으므로 이 분야의 2010년대 초반 여성작가를 거론하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해서 살짝 이른 시기의 여성작가의 SF 또는 환상문학 작품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고 좋았고 심지어 작..

封印夏伊尼應援棒甦生記全末(봉인샤이니응원봉소생기전말)

封印夏伊尼*應援棒甦生記全末(봉인샤이니응원봉소생기전말)*중국어 한자로 샤이니는 夏伊尼로 표기한다 나로 말하자면, 샤이니의 오랜 팬이다. 한때는 공식 팬클럽 샤이니월드 멤버였고 정규8집까지의 모든 앨범을 가지고 있다. 자주는 아니어도 각각 멤버의 sns에 좋아요를 누르며 그들의 동태를 살폈고 멤버 종현이 라디오를 진행할 때는 매일은 못 들어도 팟캐스트로 따로 들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 모든 팬질이 과거형으로 끝난 데에는 팀의 완전체 활동보다는 개인 활동이 많아져-이것은 공장형으로 생산되고 상품처럼 소모되는, 생명력이 짧은 모든 아이돌 멤버의 수순이라고 생각한다-모든 콘텐츠를 팔로업 할 수가 없어진 데다 종현의 죽음도 한몫했지만 결정적인 것은 팬플랫폼의 등장이다. SM엔터테인먼트가 쓰는..

장담컨대, 책덕후 중에는 한탸가 원탑이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문학동네/ 2016도서관 검색대에서 다른 사람의 검색기록에 있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가? 나는 있다. 우리가 보통 책을 검색한 후 찾아 읽는다는 것은 이미 어떤 책을 읽을지 마음을 정하고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 책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읽고 싶은 욕구도 충분히 있다. 그런데 누군가 남긴 검색의 흔적을 보고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 나도 읽어볼까 하고 읽는 건 탐구정신 혹은 도전정신, 열린 마음 그리고 약간의 행운이 필요하다. 처음 보는 책인데 다른 누군가에게는 찾아 읽을만한 ‘흥미로운 책’에 대한 탐구정신, 읽을 계획이 없는 혹은 사전 정보가 없는 책이라 실패할 가능성이 있지만 ’그럼에도’에 대한 도전정신, 아직 검색창에 남아 있다면 찾아본 그 사람이 ..

밀실의 진화, <방주>

방주> 유키 하루오/ 블루홀식스/ 2023밀실의 진화, 방주간만에 허를 찔리는 일본 추리소설을 찾았다. 1993년생의 젊은 작가가 세 번째 작품으로 발표한 추리물치고는 꽤 수작인 것 같다. 이른바 클로즈드서클물인데 이제는 새로울 게 없거나, 뻔한 결말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너무 많이 나간 듯한 느낌이 전혀 없다.(그 재미있다는 나이브스 아웃도 쌍둥이 동생이 나오질 않냐...)  살인이 발생했다. 누군가 그의 목을 졸라서 살해했다. 그 누구도 인생을 살면서 감히 경험할 것이라 상상치 못할 대사건이 틀림없다.하지만 지금 우리를 위협하는 건 살인이 아니다. 우리는 살인보다 훨씬 큰 위기에 봉착했다. 오히려 그가 살해당한 것을, 꽉 막힌 상황을 돌파할 계기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산속에 묻힌 이 화..

버스를 놓치면 인류애가 차오른다

버스가 온다. 그렇게 기다리던 버스가. 다음 버스 도착시간은 17분 후. 이번에는 놓치면 안 된다! 그러나 내 앞에 선 노인분은 내가 내민 지도앱을 보고도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내가 뭐 늘 인간미 철철 넘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박절한 인간으로 살아오지는 않았는데....... 버스와 좋은 사람,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오랜만에 서면에서 식사 약속이 있었다. 집에서는 버스로 한 시간이 넘는 거리고 배차 간격도 길어서 돌아올 때 대중교통 앱을 미리 확인하고 시간에 맞춰 정류장을 향했다. 부지런히 걸어 버스전용차선에 세워진 환승센터 횡단보도 앞에서 그만, 놓쳤다. 내 버스. 배차 격이 거의 20분에 집까지 가는 유일한 노선인 그 버스를 놓쳤다. 그것도 바로 코앞에서! 억울한 마음 호소할 길이 ..

젠더관점에서 본 탐정소설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 연구

1. 들어가며: 왜 탐정소설과 여성인가? 탐정소설은 현실에 기반한 범죄와 미스터리가 발생하고 이를 해결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 지극히 현실주의적일 수 밖에 없다. 범죄사건이 마법이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과학기술로 발생되어서는 현실 인간인 탐정이 이를 해결할 수 없고 그렇기에 상당 부분 하이퍼리얼리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밴 다인이 추리소설 작법 20원칙을 만들며 그 첫 번째 조항을 독자에게도 똑같은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 역시 현실의 독자가 예측할 수 없는 초현실적인 범행 배경이나 수법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일 것이다. 물론 최근 SF문학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미래사회나 미래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미스터리소설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지만, 이 역시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탐정이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