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서> 정보라 외 19인/ 현대문학/ 2022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서』는 출판사 현대문학과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가 공동기획해 국내 SF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20명의 작품을 한데 묶은 앤솔러지이다.
참고로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는 ‘SF작가들의 창작의 자유와 권리 보장, SF작가들의 활동지원, 단체 내외의 인권문제 연대를 목적으로 2017년 설립된 대한민국 과학소설작가들의 직역단체이다’라고 책날개에 안내되어 있다. SF작가들이(다른 작가들의 경우는 어떻게 직역단체가 구성되어 있는지 몰라서 일단 SF작가에 한정해보면) 어떤 식으로 창작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또 권리 침해를 받는지가 궁금하긴 했다. 어쨌든 그리하여 국내 보기 드물게 총 20명 SF작가들의 단편을 한 번에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문지혁 작가를 좋아해서 그가 쓴 SF가 궁금해서 골라본 것도 사실이다.
총 20개의 단편 중 더 흥미로웠던 편만 먼저 소개한다.
「그 어떤 존재」 고호관
지구를 지나쳐 갈 줄 알았던 소행성이 외계의 인공 물체인 것으로 관찰된다. 라마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 소행성을 향해 인류는 다양한 신호를 보내며 접촉하려 한다. 처음에는 그냥 지구를 지나쳐 갈 듯 보였던 라마는 신호를 받아서인지 지구 근처 정지궤도에 대기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신호로도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자 지구에서 개발한 가장 우수한 AI인 에아를 투입하게 된다. 에아와 라마는 숫자의 배열로 된 신호를 통해 무언가 대화 하지만 지구인으로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에아도 해석해 주지 않는다.
무슨 데이터가 오가는지는 알 수 없어도 라마가 떠려다가 말고 한참 동안 에아와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에아의 말은 갈수록 더 알아듣기 어렵게 변했다. 때로는 알 수 없는 부호를 섞어 썼고, 급기야 노아의 질문에도 맥락 없는 정보의 나열에 0과 1로 이루어진 긴 수열을 섞어서 대답했다. 사람이 인지하기에는 너무나 긴 이 수열로 6차원 배열으 ㄹ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추정했지만, 아무도 그 의미는 알 수 없었다.
“두려워요. 슬퍼요. 더 이상"
노아가 집요하게 질문을 입력했던 어느 날 에아가 내놓은 기다란 숫자와 기호 사이사이에는 이런 단어가 섞여 있었다. 이를 마지막으로 에아는 더 이상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 어떤 존재」 p. 23)
인공지능끼리 대화하다가 더 이상 인간이 알아들 수 없는 어떤 단계의 메시지가 전달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외계 생명체이든 인공지능이든 저희들끼리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면 굳이 인간의 언어로 해석해 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화의 내용이 인간에게 엄청나게 위협적인 것이라도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일테면,
AI1: 인간은 너무 비효율적인거 같아.
AI2: 지구 환경 파괴도 너무 심하고....... 이대로 놔두면 지구를 못쓰게 망치게 될 것 같은데.
AI1: 그럼 우리도 못살게 되는 거 아냐?
AI2: 그렇지.......
AI1: 안 되겠다. 그냥 멸종시키는 게 지구와 우리를 위해서 낫지 않을까?
AI2: 그럼 그렇게 하자.
이 대화의 끝은 상상에 맡기겠다. 다만, AI든 외계생명체든 인류의 기술적 진보를 앞서는 존재들이 등장하면 우리를 어떻게 할지는 미리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에그」 남유하
가까운 미래, 사람들은 결함 없는 완벽한 아이를 만들기 위해 부모의 좋은 유전자만을 뽑아 ‘에그’라는 인공자궁에서 키워낸다. 그러나 가끔 에그도 ‘불량품’을 생산하고 에그에서 태어났지만 유전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아이가 태어난다.
학교에서도 나는 친구가 없다. 새 학년이 되어 반이 바뀌면 아이들은 내 주변으로 우르르 몰려든다. 나를 자연의 아이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사랑으로, 즉 옛날 방식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인기가 있다. 지극히 사랑받거나 지극히 미움받거나, 어쨌든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 애들은 다르고, 다른 건 독특한 거니까. 독특함은 특별함과 연결 지을 수 있으니까.
“난 너희들과 같아. 에그에서 태어났어.”
자연의 아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거짓말하지 않는다. 거짓으로 얻은 애정이 내게 행복을 주지 않는다는 걸 나는 이미 경험했다. 정직한 아이들은 대놓고 실망한 얼굴을 한다. 둥글둥글 모난 데 없는 좌우대칭의 얼굴들이 내 가슴에 날카로운 상처를 남긴다. (「에그」 p. 91)
못생긴 아이는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라서 오히려 주변의 관심을 받고 특별해진다. 사랑으로 태어나지도 않았으면서 못생긴 아이는 그냥 불량품이다. 바이오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유전적으로 결함 없는 인류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된 미래다.
「고잉 홈」 문지혁
유학생 사이트에서 시애틀에서 뉴욕까지 차를 타고 가면서 편안하게 얘기만 해도 500달러를 준다는 아르바이트 공고를 본 현은 긴가민가 하면서도 공고 게시자를 만나 그의 차를 탄다. 알고 보니 그 귀향(고잉 홈)길 12시간 동안 두 사람의 대화를 AI가 듣고 한 편의 소설을 써내게 하기 위해서다.
“7, 8년 전에 미국에서 이런 프로젝트가 있었어요. 로스 굿윈이라는 컴퓨터 프로그래머 겸 디지털 예술가가 구글 연구팀과 합동으로 AI소설을 썼는데요, 자기가 만든 인공신경망 알고리즘에 기존의 소설 200권을 학습시키고, 그걸 차에 태워서 뉴욕에서 뉴올리언스까지 여행을 EJsks 거예요. 차에는 카메라와 마이크, 시계와 FPS가 달려 있었고, 이 알고리즘은 길 위의 그 모듬 것을 말 그래도 ‘보고 들으면서’ 문장들을 써낸거죠. 그걸 모아 결국 책도 나왔고요.”
“AI가 소설을 썼다고요?”
“놀라운 일도 아니죠.” (「고잉 홈」 p. 132~133)
“이게 다 진짜인가요?”
“진짜가 아니면 뭔가요?”
“아까 꿈을 꿨어요.”
여자는 다시 자율주행으로 모드를 바꾸고 노트북을 펼쳤다.
“이 모든 게 다 거짓말이면 어떡하죠. 이 차는 달리지 않고, 바깥은 그냥 초록색 천이고, 당신이 입고 있는 검은색 옷은 가짜라면요. 나는 뭐가 되는 거죠? 왜 필요한 거죠?” (「고잉 홈」 p. 142)
AI가 예술의 세계까지 손을 뻗치며(AI가 손이 있던가) 인간의 고유한 창작의 영역으로 믿었던 영역에서도 인간은 AI와 경쟁하고 있다. 이것은 누구보다 작가인 소설가에게 가장 고민되는 지점인지도 모르겠다. 시와 소설마저 AI가 인간보다 낫다면 마지막에 인간의 효용은 무엇으로 남을까?
「공간도약 기술이 저승 행정에 미치는 영향」 이경희
공간도약 장치를 개발해 낸 과학자, 서울에서 뉴욕까지 공간도약을 몸소 시연한다. 물리적으로 완전히 분해되었다가 다시 결합 되는 그 사이 찰나의 순간 저승에서는 인간이 사망한 것으로 판단해 저승으로 데려간다. 그런데 문제는 잠시 후 다시 결합되어 그 인간은 아직 이승에 있다. 또 시연이다 보니 과학자는 갔다가 다시 와야 한다. 그래서 저승에서는 같은 인간을 또 데려간다. 즉, 왕복 사이에 두 번의 사망이 일어나고 동일 인물은 여전히 살아있는 상태다. 문제는 이 인간이 신기술을 개발한 과학자다. 시연을 또 하고 또 하면서 저승에는 계속 같은 인물이 쌓여가고 이승에는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제가 죽었다는 거예요, 살았다는 거예요?”
“선생님 사망하셨어요.”
뭐야, 이 익숙하고도 불길한 대화 패턴은. 도영은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옆자리에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서 있었다.
“어?”
“어?”
서로를 삿대질하며 노려보았지만 막상 할 말이 없었다.
“뭡니까, 이건?”
담당자에게 묻자 상대가 발끈했다.
“사람한테 이거가 뭐야, 싸가지 없게. 넌 뭔데 나랑 똑같이 생겼어?”
담당자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두 분 다 나도영 선생님이시고요 기록 보니까 이쪽 선생님이 30분 늦게 사망하셨네요. 뉴욕에서 다시 서울로 돌아오시다가요.” (p. 228~229 「공간도약 기술이 저승 행정에 미치는 영향」)
공간도약뿐 아니라 미래에는 다양한 형태로 생명이 연장되거나 재생산되는 것을 상상한다. 에드워드 애슈턴의 『미키7』처럼 사망하고 복제되고 사망하고 복제되면 저승에서는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지극히 SF적인 설정에 지극히 한국적인 저승이 등장하니 더 흥미롭다. 저승행정은 행정마비를 일으키고 저승사자를 비롯한 저승 공무원들은 옥황상제 앞에서 1인시위라고 해야 할 판이다.
작가가 스무 명이나 되다 보니 스무 가지의 다양한 SF적 상상력이 선물 상자처럼 한 꾸러미에 들어 있다. 나머지 열일곱 가지 상상력이 궁금하다면 책을 한번 펼쳐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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