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프티 피플> 정세랑 지음/ 창비(2016)
50명이래서 뭐가 50명인가 했더니 진짜 50명이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소설이었다!
플래너를 뒤적이다 오래전에 메모한 다음에 읽어볼 도서 리스트에 <피프티 피플>이 있었다. 보통 새로운 책을 읽을 때 간단한 리뷰만 읽는다. 리뷰마저 읽지 않으면 무슨 책인지조차 모르니 선택을 할 수가 없고, 너무 자세한 설명은 기대와 편견을 동시에 갖게 해서 최대한 멀리한다. 당시에 내가 왜 <피프티 피플>을 리스트에 올렸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함께 리스트에 있는 책들을 회사도서관에서 검색해봤더니 유일하게 이 책만 있어서 빌렸을 뿐이다.
그래서 피프티 피플이 뭘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이렇게 독특한 형식으로 쓰인 책인지도 모르고 읽고...... 놀랐다. 다 읽고 나서야 작가의 후기를 보니 애초에 ‘모두가 주인공이거나 주인공이 없는’ 소설을 구상했었고 쓰다 보니 50명(사실은 51명)이 주인공인 소설을 쓰게 됐다는 걸 알았다.
소설은 대략 50명(경우에 따라서 비중이 있는 조연이 있어서 내게는 50명을 조금 넘는 것으로 느껴진다)의 평범하다면 평범한 사람들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하나의 짧은 소설이 되어 전체를 이루는 단편집의 느낌이다. 때로는 그 개인이 이래저래 얽혀 있어서 다른 이의 이야기를 읽다가 어? 이 사람 아까 어디서 나왔지? 할 정도로 느슨한 연결고리가 있긴 하지만 장편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리고 그 개개인의 스토리는 대단히 극적이거나 버라이어티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소소한 공감과 감동을 준다. 정세랑 작가의 다른 작품인 <시선으로부터>가 수십년에 걸친 한 사람의 인생과 가족의 이야기가 시공간적으로 또 인물 간의 관계성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한 부분을 놓치면 다음 상황의 전개를 따라잡기 힘든 구조라면 <피프티 피플>은 중간에 몇 편은 건너뛰어도 혹은 맘에 드는 피플을 몇 개 쏙쏙 빼 읽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박소연의 소설집 <재능의 불시착>에서 마지막 언성 히어로즈(unsung heroes) 파트에 출연한 자잘한(?) 주인공들이 대거 출연하는 느낌도 있고. 그렇다고 이 자잘한 주인공들의 삶이 자잘하지는 않다는 건 대부분의 독자가 공감하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능력, 인생의 러닝타임이나 주변에 대한 영향력 같은 것과 상관없이 그냥 하나의 완결된 풀스토리다. 딱히 대단할 것 없는 인물들이 자기 앞에 놓인 삶을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내는 것 자체가 인생이란 걸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잘하게’ 살아가지만 이들은 어딘가에서 누군가로 다 얽혀있다. 형제자매나 가까운 지인처럼 관계가 짧고 명확할 때도 있지만 사돈의 팔촌식으로 몇 단계를 거쳐야 연결고리가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한때 유행했던 ‘여섯 단계의 법칙’처럼 전 세계 누구라도 몇 단계만 거치면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물며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 안에서는 말해 무엇하랴. 일테면 첫 에피소드인 ‘송수정’의 엄마가 암치료를 위해 입원 중일 때 회진하는 교수 뒤에 따라다니던 인턴은 49번째 에피소드의 ‘소현재’인데 7번째 에피소드의 ‘임대열’과 같은 병원에 근무하고 임대열이 근무하는 응급실에 빵칼에 목이 잘려온 소녀의 어머니는 네 번째 에피소드의 ‘조양선’인 식이다. 이런 관계성이 믿어지나? 너무 소설 같은가? 나의 경우 내 대학절친의 고향(부산) 후배인 서울신문 김모 기자는 방송기자인 남편이 거쳐온 여러 번의 언론스터디 멤버 중 하나였는데 내가 부산으로 이사를 해서 등록한 수영장에서 그의 부모님의 아파트 아랫집에 살던 사람을 같은 강습반 회원으로 만난 적도 있다. 이런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의 끈을 따라가다 보면 ‘사람은 죄짓고 살면 안 돼’라는 교조적 태도를 갖게 되기보다는 ‘기하급수’라는 수학원리는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 인간이 이토록 다닥다닥 붙어 교류를 하고 있으니 집단의 무언가를 공유하지 않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융의 집단무의식이라는 개념의 탁월함이 느낀다.
책을 읽다 보면, 한 번쯤은 소설 속 인물들의 관계도를 그려보고 싶어질 것이고 ‘나’라든 노드로 나를 둘러싼 관계도도 그려보고 싶어질 테지만, 참으세요. 알아볼 수 있게 밴다이어그램이 그려지지가 않습니다. 너무 복잡해서요. 그래서 역시 이렇게 복잡한 것 역시 인간이고 인생이구나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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