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낸 순간

버스를 놓치면 인류애가 차오른다

책날개 2025. 3. 20. 18:12

버스가 온다. 그렇게 기다리던 버스가. 다음 버스 도착시간은 17분 후. 이번에는 놓치면 안 된다! 그러나 내 앞에 선 노인분은 내가 내민 지도앱을 보고도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내가 뭐 늘 인간미 철철 넘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박절한 인간으로 살아오지는 않았는데....... 버스와 좋은 사람,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오랜만에 서면에서 식사 약속이 있었다. 집에서는 버스로 한 시간이 넘는 거리고 배차 간격도 길어서 돌아올 때 대중교통 앱을 미리 확인하고 시간에 맞춰 정류장을 향했다. 부지런히 걸어 버스전용차선에 세워진 환승센터 횡단보도 앞에서 그만, 놓쳤다. 내 버스. 배차 격이 거의 20분에 집까지 가는 유일한 노선인 그 버스를 놓쳤다. 그것도 바로 코앞에서! 억울한 마음 호소할 길이 없어 속으로만 삭이며 정류장 의자에 앉아 버스 안내 전광판을 보고 또 보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는데 앞에서 무슨 말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웬 노인분이 내게 뭔가 묻고 있다. 이어폰을 빼고 들어보니 68번 버스가 여기 서냐는 얘기다. 일단 정류장 안내판을 대충 훑었다. 68번은 안 보인다. 여기 정류장이 맞냐고 여쭤보니 용호동 성모병원에 가야 하는데 누가 68번 타라고 해서 이쪽 정류장으로 오셨단다. 지도앱을 빠르게 검색해 보니 이 정류장이 아니다. “이거 지도 한 번 보세요. 우리가 여기죠? 할아버지 타셔야 하는 버스는 여기 돌아서 저쪽 정류장인 거 같은데요?”

그런데 바로 그때, 내가 타야 할 버스가 정류장 진입로에 들어선다. 건널목에 초록 불 깜빡이면 무조건 뛰고, 친구가 연락 없이 5분만 늦어도 내 시간비용이 얼만 줄 아냐며 따지는 나다. 그런 내가 버스를 무려 17분이나 기다렸는데, 지금 당장 땅을 박차고 나가 버스 앞으로 달려들어야 하는데! 그런데 앞에 할아버지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버스야 잘 가라, 기사님 오늘 저랑은 인연이 없으시네요. 차마 버스 뒤꽁무니를 보지 못하고 어르신을 향한다. 어차피 배차간격 긴 버스 덕에 시간은 넉넉하다. “이쪽으로 오세요. 저쪽 횡단보도까지 같이 가 드릴게요.” “고마워요, 아가씨.” 이 기분 뭐지? 뭔가 가슴이 따끈해지는 것 같은 이 느낌? 눈 어두운 어르신이 아가씨라고 불러줘서 좋은 것만은 아니다. 뭔가 인류애를 채운 느낌 때문이다. ‘나 좀 괜찮은 인간이 되고 있나 봐하고 혼자 웃는다.

내가 가장 빛났던 순간이 언제인가 하는 질문을 받았다 연봉이 가장 높았을 때? 조직에서 크게 인정받았을 때? 이성에게 인기가 가장 많았을 때? 순간이란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 20, 30대 하는 긴 시간? 그날 하루? 몇 분 몇 초의 순간? 이 어려운 주제를 따라 글을 쓰려니 자연스럽게 인생 전체를 돌아보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빛났던 순간까지 가려니 급기야 인생의 업앤다운을 따라가는 인생그래프를 그려도 봤다. 아니, 아니, 이렇게는 인생의 빛을 찾을 수가 없어. 연봉은 높았지만 마음은 만신창이가 된 적도 있었고 이른바 커리어 하이를 찍었지만 곧 바로 번아웃이 오기도 했다. 그렇다면 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순간은 어떨까? 버스보다 인류애를 선택했던 그날 그 순간 나는 내가 아주 조금 더 좋아졌다. 내가 아주 희미한 빛으로 반짝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