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읽고 쓴다는 것은(책&영화 리뷰)

1차원이 되고 싶어_박상영

책날개 2023. 2. 11. 14:18

<1차원이 되고 싶어> 박상영 지음/ 문학동네(2021)

 초등학교 선생님자녀 둘과 남편을 가진 경상도가 고향40대 기혼여성인 내 친구에게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을 권했다가 다소 원망을 들었다.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남에게 싫은 소리 아픈 소리를 잘 못하는 성격(이라고 본인이 말했으므로 나의 편견은 아니다)의 친구였으므로 조용한 원망 정도에 그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아마도 퀴어 문학인지 전혀 몰랐을 것이고, '요즘 핫한 젊은 작가' 정도의 정보만 내가 줬으니까. 박상영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어서 리얼리티가 너무나 살아있어서 충격이 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한다. 나로서는 박상영의 네번 째 작품인 <1차원이 되고 싶어>는 내 초등교사 친구가 조금 더 접근하기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일단 주요 캐릭터들이 중2부터 시작되어 얼마간은 10대의 귀여움이 좀 남아있고, (퀴어이긴 하지만) 첫사랑의 풋풋함으로 말하자면 <소나기>에 뒤지지 않는데다가(와...나 지금 황순원 선생님을 도발한 거야?), 엉뚱발랄하고 앙큼발칙한 여사친 캐릭터가 동성에 대한 사랑의 난관과 난처함과 심각함을 조금은 누그러뜨려 주고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소설<1차원이 되고 싶어>는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에 10대를 보낸, 게이라는 정체성을 일찌기 깨달은 소년의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모든 첫사랑이 그렇듯(그렇다!)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에 대한 당황스럽고도 애절하며 황당하고 웃긴 이야기다. 동시에 제도교육 안에서 그 시대를 겨우겨우 살아낸 평범하고 비범한 우리들의 이야기다. 조금 더 보태면 TK라는 지역적 정서적 범주 안에서 순응하고 반발하며 자란 청소년의 성장 이야기다. 

이미지 출처: 뉴시스

 경상도 D시(대구인건 안비밀인가...)에 사는 중2 '나'는 학원친구 윤도를 좋아한다. 

 전날 밤 마트에서 가장 싼 초콜릿을 사서 인터넷 카페에서 본 레시피에 따라 뜨거운 물에 중탕을 한 뒤 하트 모양 판에 부었다. 그 위에 어설프게 프로스팅과 드리즐을 얹고 슈거 파우더를 뿌려 완성한 내 인생 첫번째 핸드메이드 초콜릿. 학교 앞 선물 가게에서 구매한 상자에 담은, 누가 봐도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초콜릿을 책상 위에 툭 올려놓고 나오는 것이 당초의 내 계획이었다. 마치 마니또라도 되는 것처럼 무심하게.
그런데 아무도 없는 강의실이, 나의 중2병이,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초콜릿을 단순히 초콜릿으로만 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가방에서 서울대 사진이 표지에 박힌 연습장을 꺼냈다. 그리고 종이한 장을 찢었다. 나의 필체와는 거리가 먼 아기자기하고 동글동글한 글맀로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발신인이 누군지도 모를 텐데. 나는 수도 없잉 고민을 하며 한 글자 한 글자를 적어갔다.
 ......
 나는 백 번 천 번 속으로만 되뇌었던 고백의 말을 정선껏 적으며 은밀한 쾌감을 느꼈다. 익명이기에 얻을 수 있는 한줌의 자유. 이 작은 종이안에서만큼은 아무런 비밀도 간직할 필요가 없었다. (p. 19~20)

 나는 아직까지 수제초컬릿을 만들어 누군가에게 줘본 일이 없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알지 못하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알아주기를 바라는 복잡한 마음을 조금은 이해가 됐다. 어쩌면 수제초콜릿을 만들어 손을 떨며 그 사람의 자리에 혹은 가방에 놓아본 사람만이 사랑을 아는지도 모르겠다. 

 초콜릿을 놓아둔 것을 다른 학원친구 무늬에게 들킨다.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은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며 평생에 걸친 우정을 나눈다.

"됐고, 이거 하나만 묻자."
"뭔데?"
"왜 하필 윤도야?"
왜 윤도냐고? 
무늬의 질문에 일순간 몸이 굳어버린 나. 곧바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무슨 소리야? 초콜릿 받은 사람이 윤도야?"라며 둘러댔다. 그리고 무늬가 대답하기 전에 잽싸게 뒤돌아섰다. 언덕을 따라 빠르게 걸어내려오며 생각했다.
왜 윤도냐니...... 그것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생각해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윤도니까. 윤도여야만 하니까. p. 38~39

 그렇다.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이유를 만들 수 있을까. 이 장면은 박상영의 다른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린다. 대보름날 풍등에 적어 넣은 소원. 이런 저런 소망들을 다 지우고 마지막에 적어 넣은 말은 "규호"라는 이름 두자였다. 그 이름 그 소원에 이유가 어디 있을까?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절박한 방식으로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 순간 세상이, 우리가 속한 차원의 세상이 멈춰버렸다. 
그 순간 우리는 하나였고, 우리였으며, 우리인 채로 고유했다. 나에게 있어서 그 순간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심지어 나머지 인생 전부와도 바꿀 수 있는 어떤 것이 되어버렸다. 
그후로도 나는 그 순간을 아주 오랫동안 기억해왔다.
내 안에 가득찬 믿음과 확신.
윤도와 함께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거라는. p. 217~218

첫사랑이 아름다운 건,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건 그것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성공한 사랑이라면 그 절절했던 순간을 기억할 필요가 없다. 매 순간 아름다운 사랑이 계속되고 있는데 굳이 예전 일을 처음의 감정을 복기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흥분해 말까지 더듬는 윤도 앞에서 우리가 함께했던 모든 계절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화선지에 먹이 번지듯 검게 덮여가고 있었다. 우리가 서로의 귀에 속삭였던 대화들이 순식간에 혼잣말이 되어버렸다. 너와 하나가 되었다고 믿었던 순간들이 다 없던 일이 되었다. 
그래, 더 해. 더 심한 말을 해. 내가 힘을 낼 수 있게. 힘을 내서 모든 걸 망쳐버릴 수 있게.
나는 우리의 시간을 지우는 말을 하는 윤도의 입에 주먹을 날렸다. 윤도는 그저 맞고만 있었다. 윤도의 입술에서 피가 났지만 나는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혼잣말과도 같은 주먹질이었다. (p. 374~375) 

그렇게 사랑은 끝나간다. 그래도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그도 나를 사랑했는지는 의심할 필요가 없다. '나'에게 맞고 있던 순간에 윤도의 속마음도 같았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 더 해. 더 때려. 내가 화를 낼 수 있게. 화가 나서 모든 걸 망쳐버릴 수 있게' 라고. 

그리고 때론 끝나버린 사랑이 증거도 흔적도 남지 않아 그건 사랑이 아니었나 아니면 나 혼자만의 감정이었나 자괴감에 빠질 때, 다른 사람을 통해 내 사랑을 확인하게 되기도 한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윤도와 나 사이의 소문을 들은 무늬가 내게 찾아와 했던 말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무늬는 나에게 별다른 질문도 어설픈 위로의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너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판별하는 방법이 뭔지 알아?"
"눈빛?"
"그런 거 말고. 안간힘을 다해 숨기고 있더라도, 심지어는 서로 좋아하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할 때조차도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아는 방법이 있어."
"그 대단한 방법이 뭔데?"
"둘이 서 있는 모습을 보면 돼. 서로 배를 마주하며 서 있으면 그건 이미 게임 끝난 거야."
무든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늬는 큰 비밀을 누설이라도 하듯 목소리를 죽였다. 
"야생에서는 눈을 정면으로 마주치는 게 싸우자는 뜻이래. 남자들끼리는 절대 배를 마주하고 서 있지 않아. 절대로. 근데 너희는 달랐어. 서로 배꼽이 달라붙을 것처럼 바짝 마주서서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똒바로 쳐다보면서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 윤도랑 너 말이야."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냥. 그건 진짜였다고. 너희 둘이 무슨 말을 주고받았고, 무슨 일을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때 그 순간은 진짜였다고."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 그의 눈 속에 내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감각하는 것. 그 순간들이, 그때 우리의 마음이 다 진짜였다는 거.
그 한마디로 말미암아 내가 살 수 있었다는 것을, 그것을 마치 경전처럼 주워 삼키고 되새겼기에 내가 간신히 그 시절을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을 무늬는 알고 있을까?(p. 394~395)

그렇게 그 사랑은 떠나고 그 시절이 끝나간다. 

 기본적으로는 가슴 아픈 러브스토리이지만 중2~고3까지의 입시경쟁 시대를 살아내는 10대의 삶을 웃기면서도 슬프게 그려낸 덕에, 동시대를 (사실 내가 조금 앞서기는 했지만) 살아낸 세대들에겐 깊은 공감이 있을 듯 하다. 장우동, 미니홈피, 화양연화, 캔모아, 불쌍한 우리 영애님 같은 에피소드(책을 사서 읽으시라)는 정말이지 내 얘기 듣고 쓴 줄. 몸은 가장 에너지가 넘쳤는데 정신적으로는 가장 지쳤던 10대, 집-학교-학원을 오가는 일상에서의 소소한 일탈은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퀴어문학 여부를 떠나서 첫사랑에 대한 가장 저릿한 한편으로 기억에 남을 <1차원이 되고 싶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