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낸 순간

나의 채식 일지

책날개 2022. 7. 24. 17:07

동물복지와 기후위기가 나를 움직이다, 그러나

나는 페스코 채식 중이다. 한마디로 육류만 먹지 않는다. 채식을 시작한 것은 2019년 봄으로 3년 좀 넘었다. 예열은 잊을만하면 다뤄지는 가축전염병과 살처분에 대한 기사를 볼 때의 불편함이었다. 인간의 이기심과 그 뒤의 잔혹함이 싫었다. 마중물은 구독중인 잡지의 쇠틀에 갇혀 똥더미에 묻혀 살다 식탁에 오르는 돼지”라는 제목의 특집기사  때문이었고, 결정적 한방은 우연히 새 책 코너에 소개된 황윤 감독의 <사랑할까 먹을까>를 읽고 나서였다. 전부터 환경문제에 대해서는 예민했다. 에너지절약이나 자원재활용, 탄소배출 감소 노력은 꽤 잘하고 있었다. 다만 채식도 그 방법의 하나라는 생각은 크게 하지 못했다. 그러다 이 세 가지 단계를 거쳐 마침내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고깃집에서 회식 해주세요, 제발!

그러나 이런 식의 지구 사랑 방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나를 규정하는 두 가지 큰 정체성 때문이었다. 하나는 직장인이라는 역할이다. 일단 하루 8시간을 일하며 세끼 중 한 끼 때때로 두 끼를 직장동료들과 함께하는 직장인으로서 쉽지 않은 방식이었다. 동료들과 함께 점심 메뉴를 고를 때, 내가 정해주는 대로 가자 하는 꼰대가 아니라면야 밖에서 사 먹는 식사에서 고기를 뺀 메뉴는 흔하지 않다. 구내식당이 있다면 훨씬 수월하기는 하지만 언제나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인 것도 사실이다.

회식의 경우는 더욱 힘들다. 어차피 나는 육식의 즐거움은 자발적으로 포기했다. 하지만 동료들의 메뉴까지 제한하고 싶지는 않았다. 채밍아웃하면 된다고? 절대 그렇지 않다. 처음 몇 번은 횟집에 가고 연어전문점에 가고 초밥을 먹는 것으로 대체해 봤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부서회식에 고깃집을 빼고 갈 수 있는 곳이 얼마나 되겠는가? 회식 얘기가 나올 때마다 나는 괜찮다, 신경 쓰지 마라, 아무거나 먹어도 된다 해 보지만 결국은 내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생선과 해산물 메뉴에서 고르는 것은 할 때마다 삼겹살집을 가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회는 호불호가 많이 갈리고, , 랍스터, 새우 등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는 직원이라도 있는 날에는 여집합이 거의 없다. 회식 때가 되면 나는 속으로 외친다. ‘제가 먹을 건 알아서 할 테니 제발 고깃집으로 가주세요!’

구내식당의 자율배식 시스템은 조금 손해보는 느낌만 빼면 페스카테리언에게는 최적이다. 앞자리 동료의 식판에는 단호박돼지갈비가 보인다 .

 

잡식 가족의 딜레마

두 번째는 집에서는 어머니이자 식사당번이라는 것이다. 채식한다고 할 때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그럼 애들도 안 먹여요?’이다. 황윤 감독의 책 <사랑할까 먹을까>의 부제는 잡식가족의 딜레마였다. 곧 나의 딜레마이다. 우리 아이들은 보통 아이들처럼 불고기나 햄을 좋아한다. 캠핑이나 집에서의 바비큐는 최애 특식이고, , 소시지, 베이컨은 무시로 먹는 반찬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육식을 제한하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며 반인권적이기도 비합리적이기도 하다. 5대 영양소를 골고루 먹여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방어논리가 있다. 단백질 식품이 육류만은 아니니까. 하지만 입에서 당기는 음식을 의식과 명분으로 억누르기엔 어린 나이이다. 아무리 채식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얘기한들 불만 없이 받아들이기는 아직 어렸다. 게다가 학교급식은 일부러라도 고기 종류를 한 가지 이상은 꼭 넣어준다.(오히려 육류가 빠지면 학부모들에게서 전화가 올 것이다.) 또한 아무리 내가 식사당번이라고 해도 다른 구성원의 욕구와 취향을 무시하고 전횡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황윤 감독처럼 아이들을 가축사육장에 데리고 다닐 수도 없지 않은가. 식사당번으로서 이런 채식지향 식단 혹은 세미채식 식단을 유지하는 것은 일반식을 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 이른바 돌밥돌밥이라고 코로나 때문에 원격 수업으로 하루 세끼를 모두 집에서 먹을 때는 그야말로 삼시세끼 메뉴선정 대환장이다. 어린이용 하루 세끼를 해대려면 프랑크 소시지와 스팸, 치킨너겟, 꼬마돈가스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은 일주일에 두 번의 노미트데이(no meat day). 우리집의 경우는 수요일과 토요일이다. 일주일에 두 번 노 미트도 쉽지는 않다. 보유하고 있는 식재료 재고도 정확히 파악되어야 하고 국이나 반찬이 같이 내는 다른 반찬의 종류와도 어울려야 한다. 노미트데이에 안 먹었다고 다른 날에 왕창 먹는 풍선효과도 조심해야 한다. 최선의 방법은 일주일치 식단표를 짜는 것이다. 나의 경우 매주 일요일 저녁에 일주일치 아점저아점저를 짜는데, 머리 싸매고 끙끙대는 시간이 못해도 30분은 걸린다. 가끔 아이들이 식단표를 보고 내일 노미트데이네, .”하는 푸념 정도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배짱도 필요하다.

주방벽에 붙어있는 식단표. 일주일 두 번 노미트데이가 있다. 기본적으로는 수, 토요일이지만 경우에 따라 옮겨가기도 한다 .

 

나의 노력이 성과로 확인된다면 좋을 텐데

이런 문제들을 어느 정도 해결해도 아직 남은 것들이 있다. 일테면 평소에도 빈혈이 있었던 나는 육류에 풍부하다는 철분을 다른 식으로 섭취해야 했는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아서(철분 함량이 높은 채소라는 시금치는 익히지 않고 생것으로 잔뜩 먹어야 하고, 렌틸콩이나 캐슈넛은 흔히 먹는 재료는 아니다) 철분보충제를 따로 먹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철분보충제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동물의 또다른 희생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갖은 어려움을 뚫고 버텨온 비건으로서의 의지가 한방에 무너지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다. ‘너 하나 그런다고 달라지겠냐는 채식무용론이다. 이 말 한마디에 쉬이 흔들리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의심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40년 동안 사랑해왔던 히레가스를 애써 참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동물복지와 기후변화에 도움이 되는지 내가 모르겠기 때문이다. 구내식당에서 불고기를 식판에 올리지 않아도 배식대에는 같은 양의 고기가 쌓여있다. 내가 안 먹으면 그만큼 음식물 쓰레기가 느는 것 아닌가. 비록 내가 고기를 안 먹어도 회식이나 가족 외식에서의 고기 주문량은 크게 줄지 않는다. 그냥 나만 못 먹을 뿐 육류 생산량이 그대로라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복잡한 육류생산과 유통과 소비의 흐름 속에서 나 하나의 존재감이 너무나 흐릿하다 보니 채식주의자로서의 효능감이 없는 것이다. 나는 고기를 싫어해서나 몸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온전히 의지와 노력으로 섭취를 중단하고 있기 때문에 효능감이 없으면 동력도 없다. 나의 이런 노력이 계량화된 성과로 확인될 수만 있다면 그 무엇보다 큰 동기부여가 될 것이다. 이 방법을 연구해줄 경제학자나 물류학자, 생태학자나 환경운동가는 없는가?